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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투더본" (to the bone) ; 거식증을 다룬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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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기 | Date 2020-11-10 10:40:41 | hit 3,434 |
작품명 : 영화 "투더본" (to the bone) ; 거식증을 다룬 영화 내용 : 감독마티 녹슨출연키아누 리브스, 릴리 콜린스개봉미국
현대 사회 대부분의 여성은 아니, 대부분의 남성도 몸매와 외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몸매와 외모에 대해 연연해하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집착하고, 또 과식 내지는 폭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열등감이나 완벽주의, 수치심이 심하지 않다면, 우리는 대개 적당히 다이어트하고 적당히 과식하다가 적당히 불만족해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월경이 멈춰질 정도로 저체중이 되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될 정도로 폭식, 구토의 빈도가 잦아지지는 않는 것이다. 분명한 식이장애라고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증상이 뚜렷한 사람들은 거식 폭식 증상의 이면에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거식과 폭식이라는 드라마틱한 증상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고, 진짜 빙산의 몸체에는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 “난 너무나 수치스러운 존재야” “완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가치가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믿음들, 그리고 그러한 믿음들을 생기게 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실로 식이장애는 트라우마의 용광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당사자인 식이장애 환자가 자신의 거식 폭식 증상과 트라우마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2017년에 만들어진 영화 <투더본(To the bone)>은 거식증을 앓고 있는 20살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주인공 엘런은 갈비뼈가 흉하게 들어날 정도로 마른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엄청 음식이 먹고 싶지만 체중이 늘어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음식을 삼킬 수가 없는 상태이다. 스스로 손목 굵기를 재면서 자신의 체중을 가늠하고, 조금이라도 칼로리를 소모하기 위해 등에 멍이 들 정도로 윗몸 일으키기에 집착한다. 또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하고 학대하면서 자신은 그러한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 같이 보인다. 이렇듯 영화 초반에는 거식증을 갖고 있는 주인공의 적나라한 증상들과 특징적인 사고방식들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헌데 주인공 엘런이 거식증에 걸린 이유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있다. 그녀의 가족 관계가 좋지 않고(엘런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엘렌은 같이 사는 새엄마와 사이가 나쁘다), SNS에 올린 엘렌의 그림을 보고 어떤 여자 아이가 자살을 하여 그녀가 죄책감을 심하게 갖고 있다는 정도를 보여줄 뿐인데,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그녀의 이해하기 힘든 증상들을 다 설명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사실 거식증 뿐 아니라 대부분의 질병들은, 심지어는 암도 발명 원인이 불명료한 경우가 많다. 유전적 요인, 심리적 요인, 가족 요인, 사회적 요인 등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발병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식증 증상이 점점 악화되어가던 엘런은 새엄마가 추천하는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고, 그가 운영하는 자율요양원 같은 시설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은 엘런과 비슷한 처지의 거식증 환자, 그리고 폭식증 환자들이 같이 생활하면서 식사를 함께하고 서로 소통하며 집단상담치료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엘런은 발레를 하다가 무릎을 다치고 난 뒤 거식증에 걸린 남자를 만나게 된다. 식이장애를 여성만의 질병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남성이 거식증 폭식증 증상을 갖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남자 식이장애 환자들은 어린 시절 비만으로 인해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다가 식이장애가 생기기도 하지만, 딱히 다이어트에 심하게 집착하지 않았는데 운동을 심하게 한다거나, 혹은 군대 같은 단체생활을 하다가 급격한 체중 감소를 경험하고 난 뒤에 식이장애가 생겨난다. 엘런과 이 남자 식이장애 환자 사이에서 로맨스가 살짝 생겨나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긍정적인 경험도 그녀의 체중을 증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성이 점점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본인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이나 애정 같은 것을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한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고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쌓고, 때로는 상처를 주어 밀어낸다.
비록 항상 바쁜 아버지는 참석하지 못했지만(엘런의 아버지는 영화에서 끝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새엄마, 이복여동생, 친엄마, 친엄마의 파트너(여성이다)가 모두 함께 모인 가운데 가족치료도 시도해보지만, 역시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할 뿐, 엘런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좌절한 엘런은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게 되는데, 이 분 용감하게도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엘런에게 정면 승부를 건다. 그는 엘런에게 “겁쟁이처럼 숨지 마라. 그런 식으로 살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힘들어도 직접 부딪쳐라. 스스로 용기를 내야 한다”고 진심을 다해 말한다. 나도 내 환자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준비가 안 된 환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자제에 자제를 하고 있건만, 이 멋진 정신과 의사(키아누 리브스)분 무모하게도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고야만다. 사실 거식증 환자에게 음식을 먹어보라고 하는 것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다이어트 튜브를 붙잡고 결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 구조원이 배를 타고 그 사람의 100미터 앞까지만 다가가서 붙들고 있는 다이어트 튜브를 놓고 여기까지 수영해오면 살려주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결국 분노한 엘런은 정신과의사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시원하게 한마디해주고는 요양원을 떠난다.
요양원을 떠난 엘런은 체력 고갈로 몇 번을 쓰러지면서도 어느 시골 농장에서 살고 있는 친엄마를 찾아간다. 그녀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의 모습이라도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찾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어색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엄마는 도시 사람들이 농장 체험할 때 숙소로 쓰는 천막으로 엘런을 안내한다. 그곳에서 엄마가 안아주고 같이 자는 정도로 영화가 끝나겠구나 하고 예측했는데, 영화적 상상력은 내 평이한 예측을 뛰어넘어 저 멀리 나아간다. 먼저 엄마는 엘런을 낳고 난 뒤 산후 우울증으로 어린 엘런을 안아주지 못하고 혼자 둔 적이 많았다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엘런에게 지금이라도 직접 젖병에 우유를 담아 먹여주고 싶다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어색해진 엘런이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잠시 망설이자 엄마는 알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설령 죽기를 바라도 엄마는 널 사랑하니까 다 이해할게.” 이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널 수용하겠다는 뜻의 표현이다. 그러자 엘런은 마치 아기처럼 엄마에게 지금 우유를 먹여달라고 한다. 다 큰 딸을 품에 안은 엄마는 흐느끼는 엘런에게 우유를 먹이며 자장가를 불러준다. 이 장면이 점점 줌 아웃되면서 천막 전체를 보여주는데, 이때 천막은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고백하자면 이 기적적인 장면에서 난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상징적이지만 이것이 거식증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질병이 알려주고 있는 우리 삶의 핵심적인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거식증 환자가 음식을 먹을 용기, 체중 증가를 받아들일 용기, 즉 거식이라는 방어벽을 내려놓고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는 용기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이해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안정적인 돌봄과 연결감을 제대로 경험해야 비로써 우리는 먹느냐 죽느냐 하는 투쟁적인 생존 모드에서 벗어나, 어디로 나아갈 것이냐? 무엇을 추구할 것이냐? 하는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성장 모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이 그러할 것이다.
PS ; 이 영화의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난 가끔 환자 그리고 환자의 엄마와 같이 본다. 편집하여 약 5분 정도 되는 분량이다. 그 짧은 순간에 환자도 울고 엄마도 운다. 난 슬그머니 천장으로 눈길을 돌린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 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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